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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_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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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 이주혜

24.07.15. 월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본 강의 소개 문구였다.
무엇과 헤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도치가 물었다.
내가 기록한 나와, 내가 기록 속에 가두어놓은 나와,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서 해매는 나와.
림자는 신들린 듯 대답을 쏟아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왠지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 23p


올해는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리라, 다짐을 하고 호기롭게 산 만년 다이어리는 겨우 앞 몇 십쪽만 쓴 채 책장에 쳐박혀있다. 돌이켜 보니, 매일 나를 책상 앞에 앉게 할 동기부여는 단순히 그냥, 단순히,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있어보이니까, 나중에 추억팔이 하려고 였다. 의미없는 목적들이어서 그렇게 글을 써내려가기 어려웠나. 아직 책의 초반부라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인공이 '일기 쓰기 교실'에 가서 강사인 림자에게 일기를 쓰는 이유를 듣는 부분이 좋아서 기록해둔다. 나도 내 기억과 멀어지기위해 내 수치심을 견뎌내기 위해 일기를 쓰고 싶다.

수많은 자음 중에 시옷을 선택한 이유 정도는 물어도 됩니까?
그냥... 시옷은... 어쩐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 생겨서요.


24.07.16. 화

어쭈, 사내작식이 제법이네. 노래를 들으며 울 줄도 알고.
시옷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남자가 시옷 앞에 우뚝 서있었다. 스피커에서 《고향의 봄》이 처음부터 다시 흘러나왔다. 시옷이 정지 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젓고 시 옷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시옷과 남자는 그렇게 앉아서 자꾸 반복되는 노래를 들었다. 남자가 어느새 눈을 감았다. 시옷은 눈을 감지 않았다. 남자에게서 알 듯 말 듯 시큼하고도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고향의 봄》 선율이 아직 쌀쌀하지 않은 응접실에 천천히 차올랐다. 숨 막히는 봄이었다. - 87p


인물의 인상이 달라지는 게 재밌어서 기록했다. '남자'는 빚을 돌려받기 위해 집에 무대포로 쳐들어와 도망간 아버지의 방을 무단점거한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던가 서재의 책을 마구잡이로 꺼내 읽는다던가, 시옷의 집에 엄청난 불청객인 그였지만 이 장의 마지막 문단 하나로 어쩐지 불량하고 껄끄러웠던 그의 인상이 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꽤 좋아하는 스토리 클리셰가 있다. 바로 '아군이 된 적군'이다. 대립각을 세우던 관계가 전복되어 친밀한 관계가 될 때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독자는 악역일 때의 인물과는 다른 면을 보게 되면 그 인물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문단이 더 기억에 남았나보다. 인물의 부정적인 면만 보여주다가 후반부에 되려 친근하고 우호적인 면을 비춰주기, 입체적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4.07.17. 수

꼬맹이 너무 혼내지 마십쇼! 제가 심심해서 놀자고 했슴다!
등 뒤에서 한껏 불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시옷의 손목을 아프게 움켜잡더니 부엌으로 끌고 갔다. 부엌문을 닫고는 시옷의 양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엄마는 시옷을 무섭게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한번만 더. 저 남자 옆에 가면.
엄마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가 죽는다. 알았니? 엄마가 죽어. - 113p


결국에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들킨 시옷. 엄마는 아이에게 강하지 주의를 준다. 엄마가 죽는다. 알았니? 엄마가 죽어.
어떤 협박이나 경고 문구보다 섬짓해져서 적어두었다. 네가 만약 그런다면, 그러면 나는 죽어. 죽는다고.


24.07.18. 목

애니의 장래희망은 탐정이었다. 애니는 소머즈나 원더우먼처럼 풍성한 긴머리를 휘날리며 범인을 잡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왜 경찰이 되지 않고?
시옷의 물음에 애니는 간단히 대답했다.
경찰 옷은 안 예쁘잖아.

애니 엄마는 선생님에게 시옷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거나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고, 눈치가 빠른 애니는 시옷이 합창단에서 사내자식으로 통하는 걸 첫날에 바로 알아채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시옷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뛰어난 탐정은 입이 무거운 법이지.


애니의 사랑받고 자란 아이다운 특유의 모습이 좋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질투가 난다. 부유한 집, 상냥한 부모, 타고난 예쁜 외모, 그런 환경에서 자란 티가 나는 때묻지 않은 성정.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 열등감을 콕콕 찌르는 것 같다. 내 부모가 달랐으면 내 외모가 달랐으면 나도 너와 같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배배 꼬인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24.07.19. 금

이쯤에서 마담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머릿속으로 인사말을 준비하고 마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아빠가 돈을 갚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시옷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마담이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시옷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제비다방 남자가 헛! 하고 웃었다. 마담에게 미안한 마음은 시옷의 진심이었다. - 157p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 빚, 어른들의 사정. 그 이질감이 이 장면을 더 슬프게 만드는 것 같다. 아무도 상처주려 하진 않았지만, 어른들이 각자의 불행과 시름에 빠져있는 사이 아이는 상처 받는다.


24.07.22. 월

꿈속의 시옷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순간 나는 깨닫는다. 시옷은 문턱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알면서도 기어이 저 경계를 넘어가려 한다고,
넘어가지 마.
나는 사정한다. 시옷은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웃음이 말한다. 더는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이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라고. 저 너머에 어떤 음험한 세계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세계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통과하는 법이라고. 어린 시옷이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다. 손을 뻗어보지만, 시옷은 잡히지 않는다. 시옷은 멀리서 내게 인사하고 문턱을 넘어간다. 그 순간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세계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통과하는 법이라고'
기꺼이 맞이하고 싶은 일은 적었고, 눈 감고 도망치고 싶은 일은 늘 많았다. 그래도 지나가야 했다. 지나가보니 알았다. 일이 벌어지기 전이 가장 두려운 법이라는 걸.


24.07.23. 화

하지만 자서전에 거짓말의 비중이 높을수록 그 글에 다치는 사람은 글쓴이 자신이 아닐까요? - 257p


드라마 '안나'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은 혼자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유명인의 자서전에는 거짓말이 얼마나 들어있을까? 죄다 자기 미화 아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중 몇 퍼센트가 진실인지 독자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딱히 비난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당장 나에게 자서전을 쓰라고 한다면, 나도 추하고 어리석고 부끄러웠던 기억들을 최대한 숨기거나 변형시키고 싶을테니까. 다만 오늘 책에 나온 저 한 문장에 스스로 뜨끔할 뿐이다. 내 일기장에 썼던 수 많은 거짓말들을 떠올리면서.


24.07.24. 수

별일 없어요. 엄마는요?
언제부턴가 나는 엄마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언어가 관계를 규정한다기 보다 관계가 언어를 발생시킨다고 믿었기에 엄마를 향한 존대는 어색하지 않았다. 듣는 엄마가 언어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러다 남동생이 서른 넘어 갑자기 내게 존대를 하기 시작하면서 언어에 따른 미묘한 관계의 변화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되었다.

나이 차가 열살이나 나서 언제나 아기처럼 누나! 안아줘! 누나! 업어줘! 했던 애가 데면데면 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이 대화라는 것을 나눌만큼 자주 만나거나 통화를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아이의 거리 두기에 조금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존대에 사실 엄마도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하고. - 310p


역지사지의 마음. 종종 타인이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을 때 내 행동을 다시금 의식하게 된다. 화자의 존댓말 이야기도 공감이 갔다. 나는 상대에게 예의를 차린다고 존댓말로 대한 건데 막상 상대에게 존댓말을 들으면 거리두기하는 것 같고 관계에 선을 긋는 느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거울 효과랄까.
내가 제 3자가 되어서 나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좀 더 객관적이고 선명하게 나를 바라볼 수 있을텐데. 어렸을 적, 꿈 속에서 유체이탈한 영혼 시점으로 나를 바라봤던 적이 있었다. 분명 눈에 보이는 것은 내 모습인데 그게 '나'가 아닌 타인으로 느껴졌다. 꿈속이라 그랬나, 남이 되어 바라본 '나'는 행동도 어설프고 맹탕같은 얼굴이었지만 아주 사랑스웠다.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까. 그냥 다 내 상상일 뿐이니 별 의미 없다며 잊고 살다가도 가끔씩 그 꿈 속 '나'가 찾아온다. 바보같지만 잘 대해주고싶은 '나'. 요즘엔 다시 한번 그 꿈을 꾸고 싶다.


24.07.25. 목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결혼을 시키고 손주를 얻어야 자식이 성장의 마침표를 찍는다고 믿는 어른들의 이야기. 그런 기대에서 벗어난 자식은 부끄러워 한사코 감추려들고 그런 기대에 못 미친 남의 자식은 열심히 욕하고 비꼬아야 적성이 풀리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듣고 있으면 화가 나는 이야기. 그게 내 이야기가 되면 한없이 슬퍼지는 이야기. 엄마는 남동생이 마흔이 넘도록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번듯한 직장도 없어서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남의 불행을 물어 와 열심히 전달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자신의 실패는 조금이라도 옅게 희석하고 싶어서. - 317p


과년한 나이를 지나는 자식들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문장. 한국은 정해진 삶의 프로세스가 매우 강한 나라다. 특히 50대, 60대인 우리 부모님 세대는 더 그렇고. 부모님이 그 고정관념을 충실하게 따라 살아오셨기 때문에 자식도 그렇게 살길 강요한다. 비극의 시작이다.
... 직장을 다니고 밥벌이를 하게되면서 깨닫는다. 온전히 자기 생계를 책임지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나무랄 데 없는 인생이란걸. 자기 속도로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적당히 선글라스를 껴서 주변 시야를 살짝 차단해주고, 귀에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꽂고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내 갈길 가는 수 밖에.


24.07.26. 금

나는 엄마의 이야기에서 다른 줄거리를 건져 올린다. 윤수는 용접공이 되었구나. 윤수는 효가가 되었구나. 윤수는 잘 살고 있구나.

그 여자가 나보다 열살쯤 많았으니까 벌써 구순이겠네. 아들이 너랑 동갑이었지? 그 애도 벌써 쉰 줄이라는 말이네. 아휴, 징그러워. 언제 그렇게들 나이를 먹었어? 아무튼 그 아들이 노조를 했거든. 노조가 한창 잘 나갈 때 위원장인가도 맡고 파업도 하고 해서 월급도 많이 올렸단다. 그식랬는데 마흔 넘어서 조기 퇴직을 하고 경상도 어디에서 무슨 가게를 하면서 혼자 살았대. 먹여 살릴 처자식도 없고 퇴직금도 넉넉했을 텐데 제 엄마 곁에서 살면 좀 좋아? 거기에 정이 들었는지 회사 옆에 그대로 눌러앉았대. 가게도 잘 된다고 했는데. 무슨 가게냐고? 그건 기억이 안 나네? 그랬는데 어느 날 아들이 온다는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왔더래. 그 여자가 화분에 물을 주다가 깜짝 놀라서 냉장고에 얼려 놓은 고기를 꺼내 굽고 김치찌개나 겨우 끓여 상을 봐줬는데 아들이 엄마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면 두 그릇이나 먹더란다. 그리고 엄마 옆에서 연속극을 보다가 11시가 되니까 졸리다고 작은 방으로 자러 갔대. 아들이 오면 자고 가는 방이라 침대까지 있었단다. 그 여자가 다음 날 아들이 좋아하는 콩나물국이나 끓여 줘야겠다 싶어 그 밤에 무랑 명태 대가리랑 파뿌리랑 말린 밴댕이랑 넣어서 육수를 팔팔 끓여 놨대. 아침 일찍 슈퍼에 가서 콩나물만 사다 넣으면 되게. 그 여자가 술을 하도 많이 마셔서 해장국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였거든. 늙은이들은 워낙 일찍 일어나니까 새벽부터 밥도 안쳐놓고 거실 바닥에 걸레질 좀 하다가 지금쯤 슈퍼가 열었겠다 싶어 나가서 콩나물만 좀 사 와라, 말하려고 아들 방문을 열었대. 그런데 침대에 아들이 없더래. 이불도 말끔하게 개어져 있더래. 아니, 얘가 이렇게 일찍 간단 말도 없이 어딜 갔어 그래. 전화라도 걸어 보려고 핸드폰을 찾으러 나가려는데 이상하게 한기가 몰려오더래. 오싹하고 춥더래. 그래서 다시 보니 침대 옆 창문이 방충망까지 활짝 열려 있더래.
엄마!
나는 다급하게 소리친다.
왜 그러냐?
그만! 그만요!
왜?
국이…… 국이 끓어 넘쳐요. 그러니 제발 그만……
나는 손을 덜덜 떨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내 집엔 문 열린 데가 없는데 오싹하고 춥다. 좀처럼 떨림에 멈추질 않는다. 나는 눈앞에서 혼자 달달 흔들리는 내 손을 보며 주문처럼 생각한다. 윤수는 용접권이 되었구나. 윤수는 효자가 되었구나. 윤수는…… 잘 살고…… 있구나. - 319 p


중략하고 싶었지만 대사 전개, 연출, 반전, 구조가 좋아서 모두 적었다.
시옷이 응달집에서 살 때 단짝이었던 윤수가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24.07.29. 월

누나, 나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담배 가르쳐 준 사람도 윤수 형이고 담배꽁초 함부로 버렸다고 존나 혼내고 후 들떠 사준 것도 윤수 형이다? 하! 진짜 어이없게 입체적인 새끼. - 336p


재밌는 대사여서 기록했다. '어이없게 입체적인 새끼' 라는 말이 웃겼다. 일탈과 계도를 동시에 가르쳐 준 사람. 이야기도 사람도 아이러닉하고 역설적인 맛이 있어야 오래 남나보다.

24.07.29. 완독